1) <한국에서 젊은 여자로 산다는 것>①존중을 원해
- '김치녀'이거나 '개념녀'이거나 _홍승은(인문학카페36.5º)
: 어릴 때부터 내가 선택하지 않은 역할과 책임이 싫었다. “여자는 다리를 오므리고 앉아야해”라는 엄마의 핀잔부터, ‘여자는 피부가 깨끗해야해, 여자애는 얌전해야해, 여자는 털털하더라도 여우같은 면이 있어야지, 여자는 여자는 여자는…’이라고 귀에 딱지가 앉게 들어온 여자의 조건. 뿐만 아니라 ‘학생은 공부를 해야지, 돈을 많이 벌어야지, 스펙을 쌓아야지, 도전을 해야지, 자식은 효도를 해야지, 직장인은 끈기를 갖고 잘 참고 살아야지…’와 같은 ‘OO의 조건’이 싫었다.
왜 그래야 하는지 묻고 또 물었다. 그러다 보니까 사회운동을 하게 되었던 것 같다. 모두가 자유로웠으면 좋겠다는 대의를 위해서이기 전에, 부당하게 내 삶을 재단당하거나 평가받고 싶지 않아서. 내가 자유롭고 싶어서. 내가 스스로의 책임과 역할을 설정하고 그것을 지키며 주체적으로 살아가고 싶어서 사회운동을 선택했다.
그렇게 시작한 사회운동인데, 돌이켜보니 사람들에게 자주 들었던 말은 “와- 여자들이 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져? 기특하다”였다. 우리가 처음 2008년 촛불집회에 참여했을 때만해도 그렇다. 언론들이 ‘촛불소녀’를 대명사로 칭할 만큼 수많은 여학생들이 나서서 사회에 목소리를 내왔는데도, 여전히 사람들은 “여자들은 이런 사회활동에 관심 없잖아. 연애나 사적인 거에나 관심 있지 않아?”라고 말한다. 그래서 동생과 나는 어떤 단체에 가도 ‘홍자매’라고 불리며 그 ‘의외성’이 부각되었다.
아마도 이러한 의외성이 언론에서도 자주 언급하기 좋은 지점이었을 것이다. 수년간 동생에게 붙여왔던 꼬리표처럼, 아무리 정치적 피켓을 들고 서있어도 ‘청순녀’ ‘미소녀’라는 꼬리표로 부각된다. 이렇게 청순하고 미소가 예쁜 여자가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갖는다니 “얼굴도 예쁜데, 개념도 있다”는 것이다. (원문 일부 발췌)
# 원문 출처 : http://www.ildaro.com/sub_read.html?uid=7423§ion=sc1§ion2=%BC%BA%C2%F7%BA%B0
2) <한국에서 젊은 여자로 산다는 것>②세 여자의 동거
- "여자끼리 뭐해요?" _견과류
: 여성 개인으로서 존중받고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삶의 형태가 곧 ‘결혼’이라고 여기도록 만들어진 세계에서, 동생의 친구에게 결혼은 거의 유일한 독립의 방법이다. 내가 동거를 선택했듯, 살기 위해 결혼이라는 삶의 형태를 선택한 셈이다. 그런 선택이기에, 나는 결혼과 동거와 독서모임이 연장선상에서 이야기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여성 개개인에게 실제로 주어지는 사회적 자원이 적고 그조차도 편파적인 데다가 선택지가 결코 다양하지 않은 이곳에서, 너무도 달라 보이는 결혼과 동거와 독서모임을 선택한 각자의 목적이 연결되어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짐작컨대, 잘 먹고 잘 살고 싶어서다. 행복해지고 싶어서다. 때문에 웃으랍시고 하는 농담에 의해, 인생의 선택을 개인적인 것으로만 해석하는 시선에 의해, 특정한 삶의 형태를 인정하지 않는 제도에 의해 행복이 좌절되는 상황에서는, 같은 일을 겪은 여성으로서 더 이상 삼키지 말고 한 목소리를 내도 좋다.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보라고.
‘여자끼리 뭐하느냐’는 질문에 이와 같이 반문할 때, 서로의 옆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있는 ‘우리’는 여성의 자원이고 내 삶을 반영하는 모델이다. ‘우리’가 머리를 맞대고 모여 이야기함으로써 나의 불행은 비로소 성차별이라고 불리게 된다. 행복해지기 위해 이 세계가 하지 않는 질문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고. (원문 일부 발췌)
# 원문 출처 : http://www.ildaro.com/sub_read.html?uid=7439§ion=sc1§ion2=%BC%BA%C2%F7%BA%B0
3) <한국에서 젊은 여자로 산다는 것>③나의 '여성 경험'
- '여자라는 이유로' 길거리에서 당하는 괴롭힘 _잇을
: 한국성폭력상담소 활동가들은 퀴어문화축제에서 길거리괴롭힘 경험을 모으기 위해 부스를 진행한 적이 있다. 부스에 방문한 참여자 거의 모두가 다양한 길거리괴롭힘을 경험했다고 응답했다. 그러나 모 대학교에 가서 같은 질문을 했을 때 남성들은 길거리괴롭힘을 본 적조차 없다고 응답했다. 목격담조차 단 하나도 나오지 않는다는 것에 놀랐다. 내가 당장 오늘 퇴근길에 목격해도 놀랍지 않은 일들이, 같은 세대의 누군가에게는 전혀 포착되고 있지 않다니!
차별과 폭력에 반대한다고 선언하기 이전에, 우리가 늘 이용하는 공간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았으면 좋겠다. 일상적으로 다니는 길거리와 자주 이용하는 대중교통에서 성별, 성적 지향, 젠더 표현을 이유로 수많은 괴롭힘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그리고 이런 일들을 지나치게 흘려버리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렇다면 길거리괴롭힘을 중단시킬 해결책은 무엇일까? 공공장소에서 여성과 남성의 공간을 잘 분리하면 좋은가? 그것은 해결책이 될 수 없다. 특정한 사람에게 특정한 공간을 허용하는 방식이 아니라, 공공장소에는 모두의 자리가 있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오히려 우리가 공공장소에 ‘함께 있는’ 것이고, 어떻게 함께할 것인지 모색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원문 일부 발췌)
# 원문 출처 : http://www.ildaro.com/sub_read.html?uid=7450§ion=sc1§ion2=%BC%BA%C2%F7%BA%B0
4) <한국에서 젊은 여자로 산다는 것>④몸의 존재방식
- 석사학위보다 무거운 내 11kg _도영원
: 대학원 공부와 동기들과의 교류는 나에게 느리지만 확실한 각성의 계기를 주었다. 인권과 국제정치를 공부하기로 한 것은 이런 점에서도 현명한 선택이었다. 한 명의 예외도 없이 비주류-여성과 비(非)백인, 성소수자 그리고 난민 출신의 인권운동가-로 이루어진 내 동료들은, 마치 내가 성차별과 젠더 역할의 벽에 저항하고자 했던 것처럼 제각기 결코 질 수 없는 싸움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지치지 않고 이상을 추구하며 열정적이고 늘 행동하는 사람들을 전에도 후에도 본 적이 없다. 만났다 하면 밤을 새가며 토론했고, 함께 인권동아리를 창설했으며, 세미나를 주최했다. 그들은 나를 신뢰했고 나의 투쟁을 이해했다. 그리고 지정성별 여성에 성소수자로서 내면화된 억압으로 인해 나 자신조차 알지 못했던 나를 새롭게 끌어내는 과정에 변함없는 지지를 보내주었다. 자신만의 가치를 추구할 자유가 있으면, 인간은 어디까지든 강해질 수 있다. (원문 일부 발췌)
# 원문 출처 : www.ildaro.com/sub_read.html?uid=7462§ion=sc8§ion2=%B8%F6%20%C0%CC%BE%DF%B1%E2
5) <한국에서 젊은 여자로 산다는 것>⑤'교복벗고 여성주의'
- 페미니즘, 선행학습이 필요해! _최정희
: <교복벗고 여성주의> 모임은 내가 살고 있는 집 거실에서 진행되었는데, 둘러앉은 원이 커질 때도 작아질 때도 있었지만 보통 열 명 정도가 모였다. 매주 발제를 해야 한다는 건 몹시 압박이었지만, 난 그 시간이 오길 은근히 기다렸다. 거실에 모여 발제를 듣고, 사방에서 들려오는 서걱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글을 쓰고, 누군가의 글을 낭독하고, 누군가가 나의 글을 낭독하고, 공책을 돌리며 댓글을 달고…. 빼곡히 채운 글 안에 담긴 개인의 역사들, 감정들, 다짐들은 동생들을 그(녀)들로 다시 보게 했다.
티는 안 냈지만 난 동생들이 가고 난 후 조용한 방구석에 앉아 내 글에 달린 댓글들을 읽고 또 읽었다. 글에 대한 놀라움이나 공감, 위로가 한껏 담긴 글자들은 참 따스하고 몽글몽글했다. 회차가 지날수록 글자 모양만 봐도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있게 되었고, 글자에 담긴 표정과 목소리, 심지어 성격까지 읽히니 한 명 한 명이 모두 특별하고 예쁜 모습으로 마음 안에 담겼다. (원문 일부 발췌)
# 원문 출처 : http://www.ildaro.com/sub_read.html?uid=7472§ion=sc1§ion2=%BC%BA%C2%F7%BA%B0
6) <한국에서 젊은 여자로 산다는 것>⑥결혼이라는 화두
- 사람들이 언제 결혼할 거냐고 묻는다 _구루미
: 하지만 어떤 상상은 누군가에겐 불가능하다. 출산과 육아를 전담하는 여성의 경력단절, 갈수록 분화되고 심화되는 비정규직 차별, 여성노동자의 대부분이 비정규직이라는 통계, 이겨 내는 것은 개인의 몫이다. 과도하게 요구되는 ‘노력’을 쥐어짜며 우리는 지쳐간다. “당장 먹고 사는 게 바빠서”라는 말은 한국에서 비유나 과장이 아닌 현실이다. 포기와 체념에 익숙해지면서 어느 새 새로운 꿈을 꾸기는 번거롭고 부담스러워졌다. (원문 일부 발췌)
# 원문 출처 : www.ildaro.com/sub_read.html?uid=7491§ion=sc1§ion2=%B0%A1%C1%B7/%B0%FC%B0%E8
7) <한국에서 젊은 여자로 산다는 것>⑦외모 가꾸기와 표현의 자유
- 섹스어필 요구하는 사회에서 살아가기 _설경
: 그때부터 나는 타인의 시선을 통해 내가 어떤 모습으로 비춰지는지, 그리고 나는 어떤 모습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인지하게 되었던 것 같다. 화장을 하지 않은 것을 부끄러워하고, 얼굴에 못난 부분이 있는지 신경 쓰고, 혹시나 살이 찐 것처럼 보일까 걱정하게 되었다. 제대로(?) 꾸미게 되었고, 그 덕분에 예뻐졌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게 되었다. 하지만 그건 예뻐진 것이 아니라, 남이 보는 시선에 나를 맞추는 데 익숙해진 것일 뿐이었다. (원문 일부 발췌)
# 원문 출처 : http://www.ildaro.com/sub_read.html?uid=7508§ion=sc1§ion2=%BC%BA%C2%F7%BA%B0
8) <한국에서 젊은 여자로 산다는 것>⑧언어의 성차별
- 여자는 사람이 아닙니까? _나선
: 같은 칼럼에서 앤 패디먼은 자신의 어머니 애널리 제이커비(Annalee Jacoby)의 일화도 소개한다. 종군기자였던 어머니는 시어도어 화이트(Theodore H. White)와 공동 저작으로 <중국으로부터 들리는 천둥소리>(Thunder Out of China)를 펴냈다. 그런데 책에는 두 사람의 이름이 똑같이 올랐지만, 사람들의 눈에는 그렇지 않았다. 앤 패디먼에 따르면 그 차이는 서문에서부터 분명히 드러났다. “해리슨 솔즈베리는 새로 나온 판본에 서문을 쓰면서, 화이트는 19번 거명했지만 나의 어머니는 딱 한 번 거명했다.”
화이트를 19번 거명하는 해리슨 솔즈베리의 서문은 “결국 적당한 순간에 적당한 장소에 있는 적당한 사람(man)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없다”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앤 패디먼은 이에 반발해, 이 책의 저자는 남자(man)가 아니라고 지적하는 편지를 보낸다. “적당한 순간에 적당한 장소에 있는 적당한 여자를” 대신하지 못할 수도 있다고. 편지를 받은 솔즈베리는 바로 수긍하고 사죄하는 답장을 한다. 앤 패디먼은 “그/녀의 문제”를 이렇게 정리한다. “나는 솔즈베리에게 어떤 악의나 성차별을 할 의도가 있었다고 믿지 않는다. 나의 어머니가 여자였기 때문에 엉뚱한 순간에 엉뚱한 장소에 있었을 뿐이다.”
언어를 막론하고 아직도 때때로 사람들(men)은 남자들(men)만을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남자가 아닌 사람은 자연스레 배제된다. ‘여자’와 사람의 거리는 의사와 ‘여’의사, 주인공과 ‘여’주인공의 거리만큼이나 멀다. (원문 일부 발췌)
# 원문 출처 : http://www.ildaro.com/sub_read.html?uid=7523§ion=sc1§ion2=%BC%BA%C2%F7%BA%B0
9) <한국에서 젊은 여자로 산다는 것>⑨연애의 각본
- 우리는 동등한 위치에서 연애할 수 있을까? _콩콩
: 페미니즘은 성차별주의와 여성에 대한 억압을 종식시키려는 운동이고, 오빠가 아는 ‘그런 나쁜 것’(지금 생각해보면 웃기는 말이다)이 아니라고, 남성과 여성은 연대할 수 있다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에게서 돌아오는 대답은 하나였다. “넌 너무 사람을 계몽시키려고 해.”
그는 내가 자신보다 더 많이 아는 것을 견딜 수 없어했다. 취업시장에서 여성이라는 이유로 받는 성차별에 대해 그에게 토로했을 때에도, 그는 견딜 수 없어했다. 그가 내게 내놓은 답은 하나였다. “신경 쓰지 마. 넌 어리고 예쁘니까 취업이 잘 될 거야.” (원문 일부 발췌)
# 원문 출처 : http://www.ildaro.com/sub_read.html?uid=7536§ion=sc1§ion2=%BC%BA%C2%F7%BA%B0
10) <한국에서 젊은 여자로 산다는 것>⑩직장 생존기
- 이것은 '호의'가 아니라 '추가노동'이다 _찬옥
: 회사 업무에서는 책임의 소재가 비교적 명확히 가려진다. 직원의 역량은 ‘책임진 것을 잘못 없이 완수해낼 수 있는가’를 기본으로 평가되기 때문이다.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자신이 맡은 일을 잘못 없이 처리하면 유능하고, 그렇지 못하면 무능하다는 평판을 얻게 된다. 그런데 ‘돌봄 노동’과 연관된 ‘업무’에 대해서는 유독 ‘책임’ 대신 ‘호의’란 말이 등장한다.
나는 ‘돌봄 노동’에 익숙한 여성사원들을 여럿 보았다. 그녀들의 노동 덕에 많은 이들이 혜택을 보지만, 그 대가로 돌아오는 것은 ‘유능하다’는 평가가 아니다. 노동력을 들여 팀에 기여해 봤자(예를 들어 방문객이 사온 케이크를 잘라서 각자에게 나눠 준다거나) 유능한 사원이라는 호칭 대신 ‘엄마 같다’는 말이나 듣게 마련이다.
그에 비해 남자사원들은 ‘호의’란 이름의 노동을 받기만 하는 경우가 많다. 그들은 그 호의가 여성들의 추가 노동을 기반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을까? 아마 알고 있을 것이다. 스스로를 돌봄 노동에서 자연스럽게 제외시킨다는 걸 볼 때마다 특히 그런 의구심이 든다. 가장 흔한 방법은 자신이 돌봄 노동에 익숙하지 않음을 어필하는 것이다. 회사 업무를 통틀어 “전 이런 거 못하는데요”라며 자신의 무능을 이처럼 당당하게 고백하는 분야는 돌봄 노동 외엔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원문 일부 발췌)
# 원문 출처 : http://www.ildaro.com/sub_read.html?uid=7555§ion=sc2§ion2=
11) <한국에서 젊은 여자로 산다는 것>⑪교수 사회의 젠더 인식
- 대학원 면접, '갑질'로 얼룩진 5분 _리외
: 그래, 어쩌면 내가 겪은 것은 총체적인 권력 관계 체험인지도 모른다. “교수님, 그런 질문은 불편합니다.” 라고 그 자리에서 똑똑히 말하지 못한 것이 지금까지도 가장 후회된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지 못한 까닭은 나의 입학 여부를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이 전적으로 그들에게 있기 때문이었다. 입학 이후도 마찬가지일 것이었다. 언제나 ‘을’의 입장에서, 교수가 시키는 것을 하고 행동의 방향을 끊임없이 수정하고 검열해야 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내가 예민한가?’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도 ‘웃자고 던진 농담에 왜 죽자고 달려드냐’ 하는 눈초리를 나도 모르게 내면화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학생은 나이 상으로도, 사회적 지위로도, 학문의 경력에 있어서도 상대적 약자이기 때문에 교수에게 어떤 의사 표현을 했을 때 버릇없다, 나댄다, 아직 뭘 모른다는 말을 듣기가 너무도 쉽다. 거기에 더해 내가 ‘젊은 여자’라면? ‘빼박 차별각’(빼도 박도 못하게, 즉 거의 항상 차별을 당한다는 뜻) 아닌가.
만약 내가 대등한 연구자 혹은 교수였다 하더라도, 비슷한 상황에 처했을 때 비슷한 생각을 했을 것 같다는 사실이 가장 화나고 또 슬펐다. 여성으로 하여금 ‘내가 예민한가?’라는 자기검열을 하게끔 만드는 것 역시 사회 구조다. 별 것 아닌 것 가지고 지나치게 예민하게 군다는 반응은 절대 다수가 여성, 나이 어린 사람, 약자에게로 향한다. 뿌리 깊은 성차별 중 아주 작고 사소한 일면을 나는 면접장에서 경험한 것이리라. (원문 일부 발췌)
# 원문 출처 : http://www.ildaro.com/sub_read.html?uid=7572§ion=sc1§ion2=%BC%BA%C2%F7%BA%B0
12) <한국에서 젊은 여자로 산다는 것>⑫일하는 여자들의 네트워킹
- '여자의 동료는 여자' 지금 만나러 갑니다 _두둥쿠
: 한국에서 여성으로 살기 위해서는 여러 조건을 동시에 만족시켜야 한다. 저글링(둘 이상의 물체를 교대로 공중으로 던지고 잡으면서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는 곡예)과 비슷하다. 보편적으로 호감을 살 수 있는 외모와 매력, 데이트할 때 더치페이를 하는 센스와 매력 따위가 조건에 포함된다. 하나를 놓쳐서도 안 되고, 어느 하나만 유달리 잘해서도 안 된다. 마른 몸매가 아닌 여성은 아무리 똑똑해도 ‘자기관리를 하지 않는 사람’이고, 개인의 성취나 목표에 집중하는 여성은 드세거나 독한 사람이 되는 식이다.
그만둘 수 없는 저글링을 한다면 누구라도 긴장과 피로를 느낄 것이다. 부당하다고 생각했어도 버텼던 이유는, 잘하고 싶어서였다. 실제로 모든 조건을 맞춰내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 사람이 흔히 멋지다고 여겨진다. 나도 해내고 싶었다. 정말 노력하면 해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그게 착각이라는 것을 알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지만 말이다. (원문 일부 발췌)
# 원문 출처 : http://www.ildaro.com/sub_read.html?uid=7586§ion=sc2§ion2=
13) <한국에서 젊은 여자로 산다는 것>⑬성관계에서의 불평등
- 남성의 성욕만 인정되는 사회에서 섹스하기 _아랑
: 나는 내 몸을 탐구하고 몸을 즐기는 과정이 좋았지만 아무한테도 말하지 못했다. 심지어 자위를 하고 나면 내 자신이 성적 쾌락에 눈이 먼 사람처럼 느껴졌고 죄책감이 들었다. 어렸을 땐 하나님한테 제발 이런 욕구가 사라지게 해달라고 기도한 적도 있다. 여성의 자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남성들은 ‘여자가 자위를 해? 얼마나 성적 욕구가 강한 거야?’하면서 특이하다는 취급을 하곤 했다. 왜 남성들의 성적 욕구에 대해서는 ‘남자들은 원래 그래~ 다 그래~’하면서, 여성들의 성적 욕구에 대해서는 신기하다는 듯 반응하는 걸까. 우리 사회는, 사회의 시선은 나를 성적 욕망으로부터 당당하지 못한 존재로, 성적 주체가 될 수 없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사회는 여성들을 ‘성적 욕구가 없는 존재’라고 끊임없이 사회화한다. (원문 일부 발췌)
# 원문 출처 : http://www.ildaro.com/sub_read.html?uid=7603§ion=sc1§ion2=%BC%BA%C2%F7%BA%B0
14) <한국에서 젊은 여자로 산다는 것>⑭장애여성의 차별 드러내기
- 여성이 아닌 몸, 나는 그냥 장애인? _진은선
: <나를 대단하다고 하지마라>의 저자이자 장애여성 당사자이며 장애/여성인권운동가 헤릴린 루소(Harilyn Rousso)는 이렇게 말한다. “대단하다는 꼬리표는 무시당하는 것보다 낫다. 당신 입에서 뇌물처럼 달콤하게 굴러 나오는 ‘대단하다’라는 찬사는 투명인간이 되는 것, 없는 사람 취급당하는 것보다 낫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자면 당신이 나를 처음 봤을 때 피상적이고 편견 섞인 반응을 한 차례 극복한 다음, 내가 어떤 사람인지 제대로 보고나서 나를 좋아할지 싫어할지 결정하는 편이 나는 더 좋다. 그렇게 내린 판단은 최소한 진짜일 테니까.”
아주 솔직하게 말하자면, 이 글을 쓰는 과정이 나에게 결코 쉽지 않았다. 차별의 경험들을 스스로 직면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았고 어려웠다. 그러나 나의 차별을 직면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웠던 것이 있다. 내가 이야기한 모든 경험들이 장애여성‘만’의 경험으로 규정되고, 비장애여성들에겐 ‘나와는 다른 경험’으로 판단될까봐 걱정스러웠다. 친한 주변 사람들도 내 앞에서 ‘장애’라는 주제로 이야기하는 것을 조심스러워하거나 혹은 주저한다. 당연한 반응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헤릴린 루소가 이야기했듯 장애여성을 대할 때 그저 ‘조심스러운 태도’만 취해가지고는 “장애가 있지만 이래서~ 너는 참 대단하다”는 식의 편견에서 평생 벗어나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
나는 항상 묻는다. 한국사회에서 ‘당당한’ 장애여성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건 어떤 것일까? (원문 일부 발췌)
# 원문 출처 : http://www.ildaro.com/sub_read.html?uid=7617§ion=sc5§ion2=%C0%E5%BE%D6
15) <한국에서 젊은 여자로 산다는 것>⑮성차별 발언 대응하기
- '넌 너무 예민해' 예민해져야 하지 않나요?' _안윤
: 예민하다는 단어의 뜻을 사전에서 찾아보았다. ‘감각이 날카로움’, ‘사물에 대한 이해나 판단이 날카롭고 빠름’이라는 의미다.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니 우리 사회에서 예민하다는 말은 오용되고 있는 것 같다. 성차별 발언에 문제 제기하는 여성들에게 ‘네가 너무 예민하지 않느냐’고 말하는 이들은 어쩌면 이렇게 말하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뭘 그리 시시콜콜 시비를 가리려 드느냐고. 그만 좀 하라고. 그들에게 나는 되묻고 싶다.
“어떻게 당신은 예민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리하여 오늘도 나는 예민해지려고 한다. “네가 너무 예민한 거 아니야?” 라는 상대방의 무심한 반문에 굴하지 않으려고 한다. 감각의 촉수를 곤두세우고 주위에서 흘러넘치는 말에 귀 기울이려고 한다. 함부로 여성을 재단하는 말들, 친절과 이해를 가장하며 성차별의 잣대를 결코 버리지 않는 말들의 민낯을 보려고 애쓴다.
누군가는 그런 말을 채집하고 생채기를 들여다보는 일이 ‘무엇을 바꿀 수 있느냐’고 물을 지도 모른다. 성추행과 성폭력, 여성의 권리가 함부로 짓밟히고 생명을 위협받는 이 시대에서 예민한 귀를 갖는 것만으로 과연 충분하냐고 말할 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일단은 우리의 일상에서 귀를 기울이고 들어볼 일이다. 사소한 토씨, 단어에서부터, 늘 곁에 있는 가까운 사람들의 말에서부터, 그 속에 숨은 뼈와 가시를 발라내고 볼 일이다. 예민하게 듣는 일, 어떤 말이 자신을 함부로 재단하는지 아닌지를 가리는 일, 거기서부터 시작해 볼 일이다. 그것이 지금의 나에게 충분하진 않을지라도 훗날의 나에게는 무용하진 않으리라 믿는다. (원문 일부 발췌)
# 원문 출처 : http://www.ildaro.com/sub_read.html?uid=7628§ion=sc1§ion2=%BC%BA%C2%F7%BA%B0
16) <한국에서 젊은 여자로 산다는 것>⑯영화판에서 페미니스트 찾기
- 영화감독이 아닌 '어린 여성'으로 불릴 때 _남순아
: 무엇보다 나는 사람들이 나를 ‘어린 여성’으로 바라보는 것만큼, 내 다큐멘터리에 대한 평가를 제대로 해주지 않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러웠다. 종종 내 다큐멘터리와 비교되는 한 남성 감독의 다큐멘터리가 있다. 그 감독이 자신의 이야기를 했을 때 사람들은 ‘노동에 대한 다큐멘터리’, ‘20대 청년들에 대한 다큐멘터리’라는 수식어를 붙였다. 또한 그의 이야기를 적극적으로 사회적 담론과 연결했다. 하지만 내가 다큐멘터리에서 내 이야기를 통해 노동 이슈와 기본소득, 인간의 존엄에 대해 말했을 때, 사람들은 내 다큐멘터리를 ‘사적 다큐멘터리’라고 불렀다.
‘사적 다큐멘터리’ 역시 다큐멘터리의 한 분류일 뿐이고, 그렇게 분류되는 것 자체가 작품을 폄하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무엇이 사적 다큐멘터리인지, 그것이 누구의 기준에서 사적인지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나 유독 여성감독의 다큐멘터리들이 사적 다큐멘터리로 분류되고, 그렇게 분류된 영화들이 다양한 사회적 담론과 연결되지 못한 채 고립되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사적 다큐멘터리라는 분류는 젠더화되어 있으며, 은연중에 그 다큐멘터리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덜 중요한 것’, ‘사소한 것’으로 만든다. (원문 일부 발췌)
# 원문 출처 : http://www.ildaro.com/sub_read.html?uid=7636§ion=sc1§ion2=%BC%BA%C2%F7%BA%B0
17) <한국에서 젊은 여자로 산다는 것>⑰로스쿨에서 본 사회
- 법관·법학교수·로펌 명단을 채우는 건 '남자'? _달
: 법을 공부하면서 새롭게 알게 된 단어가 있다. ‘여직원.’ 사전적 정의는 피고용인 중 성별이 여자인 사람을 뜻하지만, 실제로는 법무법인이나 법률사무소 같은 곳에서 복사나 차 심부름을 하는 사람을 지칭한다. 교양과 예절이 넘치는 판사 출신의 교수님들부터 이제 막 일을 시작한 새내기변호사들까지 자연스럽게 ‘여직원을 시켜서 자잘한 일을 한다’는 표현을 하곤 했다. 나는 그 단어를 들을 때마다 불편했다. 내가 로펌에 취직이 된다면 나 또한 여자인 직원, 여직원이 아닌가? 변호사시험 합격자들을 위한 실무연수에서는 ‘여직원 뽑는 요령’이라며 내 심부름을 잘 할 사람, 토 달지 않고 순종적인 사람을 뽑아야 한다는 내용을 가르치기도 했다.
그러니 로펌의 여성은 두 종류이다. 여직원과 여변호사. ‘남직원’이라는 단어는 존재하지도 않는다. 여변호사는 로펌의 직원이되 ‘여직원처럼 보이지 않는’ 말투나 외모, 태도를 가져야한다. 그리고 여직원은 전문적인 법과 관련된 업무 외에도 ‘커피타기’, ‘손님 다과상 준비하기’같은 일들을 함께 한다.
한 회사 안에서 같은 성별이되 명확한 역할 구분을 해두는 것은 서로에게 ‘서로를 닮지 않을 것’을 내면화하게 만든다. 학교에서 열린 취업특강에서 한 선배변호사님은 후배들을 위한 마음에서 ‘애교섞인 말투처럼 여자같은 행동을 하지 말라’고 조언했다. 여자같은 행동, 여자같은 말투는 과연 ‘여성’을 어떻게 규정했기에 나오는 것이며, 또 그런 기준으로 ‘여자가 되지 말 것’을 요구하는 건 얼마나 역설인가! 라고 생각하지만! 나 자신도 일부러 밖에서는 군대말투와 같이 ‘다나까’ 말투를 사용하거나, 실제론 약간 높은 목소리 톤을 일부러 낮게 내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조금은 분하다. (원문 일부 발췌)
# 원문 출처 : http://www.ildaro.com/sub_read.html?uid=7646§ion=sc2§ion2=
18) <한국에서 젊은 여자로 산다는 것>⑱어디에나 있는 여성혐오
- 우리는 다만 불안에 익숙해질 뿐이다 _나늘
: 나는 지나가는 여성에게 함부로 말을 걸고, 위협할 수 있는 사회, 언제든지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기분이 나쁘다면 소리를 지를 수 있는 이런 사회가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다. 내가 도움을 요청한 경찰들조차도 ‘술취한’ ‘남성’이라면 으레 “그럴 수 있지”라는 태도를 보이는 것을 견딜 수 없다. 길거리 괴롭힘이 발생해도 이것은 남성의 생물학적인 본능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고, 더군다나 술에 취해 저지른 것이기 때문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들을 이해하며 그들에 대한 분노를 가라앉히고, 미래에 발생할 비슷한 일을 불안해하지 않는 것이다. 그냥 가만히 있어야 한다. 내 영역에 함부로 침범한 그들로 인해 쌓인 불안을 나는 따져 물을 곳이 없었다. 이것은 ‘흔히 있는’ ‘늘 일어나는’ 일이지만 ‘별 일 아닌’ ‘사소한’ ‘내가 예민하게 받아들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경찰은 우리를 집까지 데려다 주며 모욕죄는 가벼운 벌금형이 선고될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고소를 고민하던 우리는, 그가 잘못을 뉘우치기보다는 벌금만 내고 끝낼 것 같다는 판단이 들어 포기했다. 그리고 만에 하나 고소했다가 우리에게 앙심을 품어 보복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했다. 사후처리를 어떻게 해야할 지 고민하고 걱정하던 우리에게 경찰은 자꾸만 별일 아니라며 너무 불안해하지 말라고 했다. 경찰은 나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 놈을 피해 마트로 뛰어가는 순간엔 정말 죽을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시달렸다는 것을. 그리고 어떤 마음으로 고소를 포기했는지도. (원문 일부 발췌)
# 원문 출처 : http://www.ildaro.com/sub_read.html?uid=7659§ion=sc1§ion2=%BC%BA%C2%F7%BA%B0
19) <한국에서 젊은 여자로 산다는 것>⑲기혼여성으로 살기
- 한국에서 '젊은 엄마'로 산다는 것 _귤
: ‘맘충’이라는 단어는 한 커피전문점에서 아이 엄마가 카페 안에서 일회용 커피잔에 아이가 오줌을 누게 했다든지, 아이 똥기저귀를 식당 테이블에 그대로 올려놓고 갔다든지 하는 공공질서나 도덕 개념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는 엄마들에게 붙여진 신조어다. 그런데 이 ‘맘충’이라는 단어가 요즘에는 아주 쉽게 붙는 것 같다. 초보 엄마이기에 흔히 할 수 있는 실수, 아이를 키우다보면 한 번쯤 겪을 법한 일들에까지 맘충이라는 이름이 붙곤 한다. 그와 더불어 아이를 데리고 어딜 가든 그다지 좋지 않은 시선들이 따라다닌다.
이렇게 아이 엄마들이 많은 동네에서조차 아이를 키우는 요즘 젊은 엄마들은 ‘남편 돈으로 여유부리는 팔자 좋은 여자’, ‘개념 없는 맘충이’라는 오명을 쓰고 살아가고 있다. ‘엄마’로서의 삶과 ‘나 자신’으로서의 삶, 그 두 가지를 모두 지키려고 고군분투하는 요즘 엄마들에게 ‘팔자 좋은 여자’, ‘맘충이’는 너무 가혹한 이름 아닐까.
나 역시도 ‘맘충’으로 어딘가에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지 말라는 법이 없기에, 어딜 가든 신경이 쓰이고 눈치가 보이는 게 사실이다. 특히 같은 엄마들끼리도 서로에게 비난의 화살을 겨누는 상황이다 보니 식당이나 카페에 가면 다른 엄마들이 동지처럼 느껴진다기보다는 왠지 모를 적대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같은 엄마들끼리 이런 비난을 하는 이유는 그럼으로써 ‘나는 맘충이 아니다’, ‘나는 개념 있는 맘이다’라는 증명이 된다고 생각해서일까. 어떤 이유에서든 ‘팔자 좋은 여자’와 ‘맘충이’ 이 두 단어는 참 불편하고도 안타까운 말들이다. (원문 일부 발췌)
# 원문 출처 : www.ildaro.com/sub_read.html?uid=7676§ion=sc1§ion2=%BC%BA%C2%F7%BA%B0
20) <한국에서 젊은 여자로 산다는 것>⑳'꿘페미' 그 힘겨운 위치
- 운동권 내 자기성찰, 페미니즘이 필요해! _고래
: 나는 내 활동공간에서 할 수 있는 작은 실천으로, 지난 9월엔 내가 몸담고 있는 운동조직의 후원행사에서 좀 더 평등하게 행사를 즐길 수 있는 팁을 만들어 메뉴판과 함께 나누어 주었다. 활동을 하면서 ‘어린 여성’이라는 이유로 받았던 편견과 무시에 대해서 SNS에 글을 게시하기도 했다. 요즘은 운동권 내부의 여성주의적 자기 성찰을 위해 여성활동가들, 나이가 어린 활동가들, 소수자 활동가들을 존중하는 방법에 대해서 쓴 소식지와 유인물을 만들고 있다. 집회에 나가 배포할 건데, 유인물을 받은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다.
사회운동을 하는 사람들의 공동체는 우리가 지향하는 사회와 닮아있어야 한다. 다른 곳보다 더 성평등해야 한다. 때문에 더더욱 이곳 사람들이 스스로를 돌아보고 변화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함께 운동하고 있는 남성들이 여성주의 책을 많이 읽고, 강연을 듣고, 여성들의 말을 듣고, 여성들이 주도하는 여성주의 운동에 참여했으면 한다. 그렇게 한다면 우리가 함께 성평등한 공동체 문화를 만들 수 있을 것이고, 성평등한 사회까지 나아갈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원문 일부 발췌)
# 원문 출처 : http://www.ildaro.com/sub_read.html?uid=7696§ion=sc1§ion2=%BC%BA%C2%F7%BA%B0
# 2016년,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는 새로운 페미니즘 담론을 구성하기 위해 "한국에서 젊은 여자로 산다는 것"을 주제로 여성청년들의 기록을 스무 편 연재했습니다. 세상의 차별과 불평등에 맞서 자신의 이야기를 꺼낸 스무 명 여성 청년 이야기를 살펴보면 이것이 온전히 하나의 '세대' 혹은 '성별'에 관한 담론만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기록은 한국여성재단 성평등사회조성사업 지원으로 진행되었습니다.
# 원문 출처 : 미디어 일다
글쓴이 _쑥
서울시NPO지원센터 아카이브 큐레이터. 봄철에 먹는 향긋한 쑥국을 좋아합니다.
한국여성의전화에서 진행하는 20대 여성인권활동가 아카데미에서 공부하고 있습니다.
문화예술, 페미니즘, 소수자에 관심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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