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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사례

[변화사례 아카이브 #02] 납작하지 않은 섭식장애 당사자들 이야기

작성자 서울시공익활동지원센터 등록일 2026-10-06 조회수 1754
활동직무 조직운영 활동분야 섭식장애 인식개선
자료출처 기관/단체 자료형태 기타

 

사회가 만들어내는 병


뼈말라, 먹토, 씹뱉. SNS에는 이런 말들이 아무렇지 않게 떠돕니다. 마름을 지향해야 할 것으로 그리는 이 언어들 앞에서, 정작 이 병을 오래 앓아온 사람들은 다른 질문을 던집니다.


"왜 이 사회는 이런 병을 계속 만들어내는가?”


2022년, 한 멘탈헬스 스타트업에서 일하던 박지니 씨는 환멸을 느꼈습니다. 자신이 20년 넘게 섭식장애를 겪어온 당사자인데도, 정작 이 회사는 환자의 진짜 회복에는 관심이 없었으니까요. '비만학회는 있는데 왜 섭식장애학회는 없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는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을 찾아다녔고 그렇게 2023년 한국 최초의 '섭식장애 인식주간'이 열렸습니다. 4년 뒤인 지금 이 행사는 한국의 섭식장애 치료 공백을 보건복지부와 국회, 국제 학술지에까지 알리는 활동으로 자랐습니다.

 

 

이름조차 없던 병


섭식장애는 거식증과 폭식증만이 아닙니다. 건강한 음식에 집착하는 오르토렉시아, 당뇨 관리와 폭식증이 겹치는 다이아불리미아, 음식을 삼키는 데 공포감을 느끼는 회피적·제한적 음식 섭취 장애(ARFID)까지 형태가 다양합니다. 정확한 원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다이어트 강박과 억압적인 환경, 먹방·쿡방이 넘쳐나는 미디어 환경이 위험 요인으로 거론됩니다.

 

그런데 한국에는 이 문제를 다룰 의료체계 자체가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습니다. 극소수의 전문 치료기관은 서울에 몰려 있고, 모든 치료가 건강보험 적용 밖에 있습니다. 섭식장애는 정신질환 중에서도 사망률이 높은 축에 속하는데도, 가족들은 쉬쉬하고 유명인들도 침묵합니다. 당사자가 병을 몰라서 걸리는 게 아닌데도, 사회는 여전히 말합니다.

 

“'잘 먹도록 가르치면 낫겠지.”

 

환자 단체이길 거부한 사람

 

박지니 씨는 20년 넘게 섭식장애와 함께 살아온 당사자이자, 2021년 회고록 『삼키기 연습』을 낸 저자입니다. 이듬해, 멘탈헬스 디지털 치료제 스타트업에서 일하며 그는 이 업계가 환자의 진짜 회복에는 관심이 없다는 걸 절감했습니다. 그러던 중 우연히 본 대한비만학회 기사에 화가 났습니다. 비만 산업에는 돈이 몰리는데, 왜 섭식장애학회는 존재조차 하지 않는가. 그는 국내외 학계와 교류해온 한 의대 교수를 무작정 찾아갔고, 교수가 슬쩍 꺼낸 '해외에서는 2월 말에 섭식장애 인식주간을 연다더라'는 말을 그대로 밀어붙여 행사를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단체 이름에는 '섭식장애'라는 단어가 들어있지 않습니다. 구소련 잠수함이 산소 부족에 민감한 토끼를 태워 위험을 미리 감지했다는 이야기에서 따온 '잠수함토끼콜렉티브'입니다. 섭식장애 당사자를 '다이어트에 집중하는 젊은 여자들'이 아니라, 사회의 위기 징후를 가장 먼저 몸으로 감지한 사람들로 보겠다는 뜻이었습니다. 

 

 

말하기에서, 지식으로 인정받기로

 

잠수함토끼콜렉티브가 2023년부터 매년 열어온 '섭식장애 인식주간(EDAW)'은 해마다 질문의 층위가 달라졌습니다.

 

2023년 첫 행사의 주제는 '납작하지 않은 섭식장애'였습니다. 서울 곳곳의 독립서점에 프로그램을 나눠 배치해, 병원 강당이 아니라 책과 문화가 오가는 공간에서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2024년에는 '인식적 정의'가 주제였습니다. 당사자의 말이 신뢰할 만한 지식으로 인정받고 있는가를 물었습니다. 2025년에는 '우리는 최대한 흩어져야 한다'는 주제로 국내 연구자와 호주,일본,이탈리아,미국의 당사자 활동가를 연결했습니다. 2026년에는 '세력'을 주제로, 국가가 채우지 못하는 자리에서 당사자와 가족이 어떻게 서로를 도울 수 있는지, 그리고 그 피어 커뮤니티가 가질 수 있는 위험까지 솔직하게 논의했습니다.

 

 

 

행사를 넘어선 활동도 이어졌습니다. 2026년에는 서울, 원주, 인천, 부산, 광주 5개 도시에서 무료 공개 Q&A를 열어 266명이 신청하고 134명이 참석했습니다. 치료는 어디서 받아야 하는지, 가족은 식사를 어떻게 도와야 하는지 같은, 당장 필요한 질문에 답하는 자리였습니다. 이 질문들은 다시 가족을 위한 초기 대응 안내서 제작으로, 당사자 동료지원 모임과 임상가 학습공동체로 이어졌습니다.

 

 

나는 사회운동가가 아니라 실험가

 

이런 활동으로 섭식장애에 대한 대중의 인식은 나아지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이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는 거죠. 어떤 이유 때문일까요?

 

하나, 박지니씨는 스스로를 '사회운동가'로 규정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하는 일을 일종의 '실험'이라고 말합니다. 어떤 개입이 사회를 어떻게 움직이는지 궁금해서, 궁금한 만큼 시도해본다는 것입니다. 이 태도는 역설적으로 활동을 지치지 않게 만드는 힘이 됐습니다. 정의와 절대선을 대변한다고 여기지 않기 때문에, 매번 다음 방안을 시도하는 데 부담이 없었습니다.

 

 

또 하나는 '환자 단체'가 되길 거부했다는 점입니다. 동정을 구하는 캠페인 대신, 당사자 스스로 세션을 기획하고 전문가를 초청하고 모더레이터를 맡는 구조를 택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처음에는 몇 명뿐이던 당사자 패널의 명단이, 2년 만에 8명이 함께 무대에 서는 규모로 늘었습니다. 서로 연결된 당사자들이 다음 해 행사의 자원이 되는 선순환이었습니다.

 

서명 598명, 그리고 조례안까지

 

2025년 7월부터 9월까지 진행한 국민서명에는 598명이 참여했습니다. 이 가운데 259명, 43.3%가 서울시민이라는 점을 근거로 잠수함토끼콜렉티브는 서울시의회에 「서울특별시 아동·청소년 섭식장애 예방 및 치료 지원 조례안」을 제안하고 공청회에서 발표했습니다. 국공립 전문센터, 건강보험 적용 확대, 전문인력 양성, 지역 격차 해소를 요구하는 이 서명과 의견은 보건복지부에도 제출됐습니다.

 

언론의 관심도 해마다 깊어졌습니다. 2023년 "섭식장애로 미끄러진 당사자가 만든 지지대"(시사IN)에서 출발한 보도는, 2025년 KBS 〈추적60분〉의 치료 공백 특집, 2026년 한겨레21 커버스토리로 이어졌습니다. 질문의 방향도 "섭식장애 당사자는 어떻게 살아가는가"에서 "왜 한국에는 치료체계가 없는가"로 옮겨갔습니다.

 

 

국제 무대에서도 성과를 냈습니다. 호주의 국제 섭식장애 연구 컨소시엄 CoRe-ED의 공식 파트너가 돼 한국의 치료 공백을 발표했고, 2026년에는 해외에 있는 연구자들과 협업해 국제학술지 Journal of Eating Disorders에 섭식장애에 대한 공동논문도 실었습니다. 국내에서 발언권을 얻기 어려웠던 당사자가, 국제 무대에서는 공동저자이자 지식 생산자로 참여한 셈입니다.

 

섭식장애에 대한 사회의 시선

 

잠수함토끼콜렉티브는 박지니 대표가 이끄는 비영리 임의단체입니다. 법인이 아니라 사업자등록번호도 없고, 후원금 영수증도 발급하지 못합니다. 처음 몇 해 동안 단체 통장의 하루 이체 한도는 100만 원이었어서, 매번 도장과 통장을 챙겨 은행 창구에 가야만 했습니다. 첫해에는 한 기업의 후원을 받는 행운이 따랐지만, 이듬해에는 그런 행운 없이 후원금을 직접 모으고 참가비를 돌려받는 식으로 재정을 꾸려야 했습니다.

 

더 근본적인 한계도 있습니다. 국제 무대에서는 파트너이자 공동연구자로 초청받는 반면, 국내에서는 매번 섭식장애의 심각성부터 다시 설명해야 합니다. 국가 통계가 부실하다는 이유로 정책은 계속 지연되고, 당사자의 경험은 사례나 홍보에는 쓰이지만 정책 결정권은 좀처럼 주어지지 않습니다. 같은 시기 섭식장애를 다루는 국가 조사는 충분치 않은데, 관련 디지털 치료기술에는 정부 연구개발비가 투입되는 모순도 있었습니다. 

작은 단체가 먼저 실험하고, 국가가 이어받기를

 

잠수함토끼콜렉티브가 최종적으로 바라는 건 민간단체가 국가의 역할을 대신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한국에 없거나 부족한 섭식장애 공공 인프라를, 작은 당사자 단체가 먼저 실험해보고 그것이 왜 필요하고 어떻게 작동하는지 보여준 뒤 공적 제도로 넘기는 것입니다.

 

 

가족을 위한 초기 대응 안내서, 당사자 동료지원 모임, 임상가를 위한 학습공동체, 청소년이 직접 질문하는 참여 프로젝트, 그리고 계속 갱신 중인 온라인 정보 포털 등. 잠수함토끼콜렉티브는 작지만 다양한 방면에서 시도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또한 단체의 목표가 국가 정책에 반영될 수 있도록 국민서명 등을 통해 노력하고 있죠. 

 

[단체 소개]

 

잠수함토끼콜렉티브는 섭식장애 경험 당사자들이 만든 비영리 단체입니다. 산소 부족에 민감한 토끼를 태워 위험을 미리 감지했다는 잠수함의 옛이야기에서 이름을 따, 섭식장애 당사자를 사회의 위기 징후를 가장 먼저 감지하는 존재로 규정합니다. 2023년부터 매년 '섭식장애 인식주간'을 열며, 당사자의 경험을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가 함께 조사하고 책임져야 할 공적 문제로 옮겨오는 활동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주요 연혁]

시기

주요 내용

2022.

박지니, 섭식장애 관련 스타트업 근무 중 문제의식을 느끼고 EDAW 구상 시작

2023.

한국 최초 EDAW 개최('납작하지 않은 섭식장애'), 잠수함토끼콜렉티브 결성

2024.

EDAW2024 개최 ('인식적 정의')

2025.2~3

EDAW2025 개최 ('우리는 최대한 흩어져야 한다') — 국제 네트워크 본격 확장

2025.7~9

섭식장애 치료·지원체계 구축 요구 국민서명 (598명 참여)

2025.11

서울시의회 조례안 공청회 발표

2026.2~3

EDAW2026 개최 ('세력')

2026.

5개 도시 지역 순회 Q&A (266명 신청·134명 참석), 국제학술지 공동논문 발표

[관련 정보]  


youtube.com/@rabbitsubmarinecol (유튜브)
instagram @rabbitsubmarinecol (잠수함토끼콜렉티브)

eatingdisorders.kr (한국섭식장애정보 포털)
instagram @eds_guide (섭식장애 길라잡이)

 

#섭식장애 #당사자운동 #인식적정의 #EDAW #잠수함토끼콜렉티브

기획 : 서울시공익활동지원센터X변화사례 기획위원회
글 : 딴짓
사진 : 잠수함토끼콜렉티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