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안 디아스포라] 먼 땅 사할린에 머물던 한인 이야기
현안과이슈 / by khoco / 작성일 : 2022.05.31 / 수정일 : 2022.06.03

  100년도 넘은 오래된 이야기이지만,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이야기. 특히 굴곡진 근현대사의 풍파 속에 그대로 침몰된 채로 남겨진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는 아직도 현재진행형입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요. 해방 후 독립이 된 이후에 상처를 매듭지을 그 오랜 시간이 있었음에도 제대로 매듭짓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2021년에 시행된 ‘사할린동포 지원에 관한 특별법’ 등 이제야 조금씩 그 움직임이 보이는 걸 생각하면 그간의 공백이 놀라울 따름입니다. 여전히 이들에 대한 이야기는 무성한 소문처럼 존재할 뿐이며, 역사가 아나톨리 쿠진이 말했듯 객관적인 연구보다 주관적 지각에 더 근거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공직자들을 포함한 대다수의 국민들은 이들에 대한 구체적인 사정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글을 쓰는 저 역시 그에 포함됩니다. 이를 계기로 조금씩 꾸준히 공부해나가겠습니다.




출처: 위키백과


사할린이라는 지명과의 만남

 사할린이란 지명을 들어보았을 것이다. 한국에서 비행기를 타면 약 3시간 여를 달려가야 하는 곳. 나 역시 언젠가 들은 적이 있었다. 단지 사할린이라는 단어만 들었을 뿐이지, 사할린 한인이라거나 혹은 사할린에 관한 역사라거나 하는 다른 이야기들은 잘 듣지 못했거나 혹은 기억하지 못했다. 사할린은 일본 훗카이도 위쪽에 자리한 러시아 지역이다. 그러나 한 때는 일제가 러일전쟁을 일으켜 북위 50도선 이남의 사할린 남부를 넘겨받았으며 한때 일본군이 사할린섬 북부까지를 점령했던 시기가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이 일제에 선전포고하고 사할린섬 남부를 탈환하고 해방 후 영유권을 선언하였다. 1951년 샌프란시소코 강화조약으로 일본은 사할린 남부 영유권을 포기했다.

 사할린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한 권의 책이었다. 재일 조선인 출신 작가 서경식의 <역사의 증인 재일조선인>(2012)에서 사할린 한인들의 문제를 다룬 부분이 있었다. 재일조선인과 같은 역사적 난민들이 어떤 경로로 형성되었는가 하는 유래를 설명하면서 저자가 호명했던 지명들—오키나와, 대만, 조선, 사할린, 중국 동북부, 남태평양의 섬—을 통해 사할린이란 지명을 다시 한 번 인지하게 된 것이다. 이곳은 모두 일본 제국이 식민지로 지배했던 곳이었다. 지배 민족으로서 일본인들은 각각의 식민지로 진출해 산업을 일구고 피지배인들을 고용하면서 생활했다. 그러나 패전, 혹은 해방을 맞이하자, 일본인들은 일본 내륙으로 속히 귀국했다. 하지만 일제의 통치 아래 있던 국가들에 자발적으로 이주하거나 일제에 의해 강제징용 된 사람들은 자신들의 조국으로 귀국하지 못한 채 더 이상 일제의 식민지가 아닌 외딴 이국에 남겨진 경우가 많았다. 저자는 그 사례로 사할린을 들고 있었다. ‘당시 사할린에는 탄광이나 임업 노동자로 끌려간 조선인이 4만 명 이상 있었지만 패전 후에는 현지에 남겨졌다’는 것이었다. 이들은 국적을 한 순간 박탈 당하고 자연스럽게  난민이 되었다.​




출처: 국가법령정보센터, 사할린동포 지원에 관한 특별법 캡쳐 이미지



사할린동포 지원에 관한 특별법과 그 한계

 아마 위 책을 읽은 비슷한 시기에, ‘사할린동포 지원에 관한 특별법’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이 법령은 10년 넘게 국회에서 표류 하다가 외교부 재외동포과 주도로 2020년 5월 26일 제정되었으며 시행은 다음 해 1월 1일에 이루어졌다. 제1조는 이 법의 제정 목적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이 법은 일제강점기에 강제동원 등으로 사할린에 이주한 사할린동포에 대하여 관련 국가와의 외교적 노력을 통하여 그 피해를 구제하고, 사할린동포와 그 동반가족의 영주귀국과 정착을 지원함을 목적으로 한다.’ 단 사할린동포를 1945년 8월 15일 해방 이전에 태어났거나 이주한 한인으로 한정하고 있다. 이에 따라 사할린 이주한인 1세대 21명이 2021년 11월 27일 첫 영주귀국 대상자로 선정되어 국내로 입국했다. 이후 12월 10까지 총 260명의 사할린 동포과 그 가족들이 순서대로 입국했다.​





출처: 대한적십자사 사이트 사할린동포지원 창 캡쳐 이미지. 출처: https://www.redcross.or.kr/business/sakhalin_support.do




1992년 최초로 영주귀국한 독신 고령 1세대 동포들이 광림교회가 마련한 사랑의집에 입소하는 장면 캡쳐 이미지. 출처:e영상역사관, 대한뉴스 제 1926호 https://www.ehistory.go.kr/page/view/movie.jsp?srcgbn=KV&mediaid=12326&mediadtl=28880&gbn=DH&quality=M&page=1


 사할린동포 모국방문은 이미 한일 양국의 적십자사의 협정을 통해 1989년부터 시작된 한일 양국의 사할린한인지원 공동사업으로 인해 추진된 바 있다. 이후 1992년부터는 사할린 동포 영주귀국을 추진했다. 다만 이때 초기에는 1945년 8월 15일 해방 이전에 사할린에서 태어났거나 이주한 고령 독신자들 중에 한국에 신원보증을 할 수 있는 친척이 있는 경우만이 주된 대상이 되었다. 이후로도 행정 편의적으로 정한 기준 때문에 한인 1세와 2세 혹은 그 후손 간의 이산 행렬이 이어졌다. 이들은 희망하는 가족들과 함께 귀국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가령 강제징용 1세대의 자녀이나 형은 44년 태생, 동생은 46년 태생인 경우와 비슷한 사례가 적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요구는 묵살되어, 한국과 사할린 사이에서 서로를 그리워하며 살아야 했다. 현재에도 일부 1세대 동포들은 자녀들과 헤어지기 싫다는 이유로 사할린 잔류를 선택했다.

 2020년 제정된 법령인 ‘사할린 동포법’ 역시 같은 기준으로 규정한 ‘사할린동포’에 더하여 동반가족, 즉 동포의 배우자 및 직계비속 1명과 그 배우자까지 지원 대상으로 하고 있다. 이에 대해 사할린 한인협회 박순옥 회장은 ‘실제 징용대상이던 동포 1세는 1900년에서 1930년대생으로 최초 영주귀국 당시인 1990년대에도 생존자가 많지 않았고 결국 이 법의 주요 대상은 그들의 후손이 될 터인데 ‘1945년 8월 15일이라는 의미없는 기준과 ‘동반가족’이라는 제약으로 두 차례, 세 차례 상처받고 있다’고 하소연했다. 이 말인 즉슨 1세동포와 ‘동반’사항이 의무이며 1세 동포가 사망했을 시 그의 직계비속이라도 귀국 자격을 얻을 수 없는 상황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출처: yes24


사할린 한인의 역사에 관한 개관

 사할린 이주 역사에 관한 좋은 연구서가 있었다. 아카톨리 쿠진의 <사할린 한인사>(2014)가 그것이다. 사할린 주 국립문서보관소 학술연구원장을 지냈던 아나톨리 티모페예비치 쿠진은 2001년 ‘러시아 극동지역의 한인 이주(1860-1937)’로 박사학위를 받은 이후 극동 사할린의 한인에 대한 연구를 수행했다. 이 책의 저자는 러시아 제국 시기 사할린 한인 이주사를 세 가지 단계로 구분하고 있다. 첫 번째 단계는 19세기 말에 해당하는 시기로, 해상으로 건너온 조선인들이 러시아 법의 보호를 받으며 어업, 광산, 농업 분야에서 일했다. 두번째 단계는 1905년 이전의 시기로, 러일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까지의 상황이다. 이 일로 시민권이 박탈될 위기에 처하자, 뿔뿔히 현지인들 사이에 흩어져 살던 조선인 이주민들은 조선 민족 집단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세 번째 단계는 1905년부터 1920까지의 시기다. 조선인의 이주의 성격이 달라지는데, 정치적 망명자들이 사할린으로 건너왔기 때문이다.
 

 1925년 소비에트 체제가 들어서고 나서도 사할린의 인구는 꾸준히 증가했다. 1920년에 실시한 첫 인구조사 기록에 따르면 남사할린에는 934명의 한인들이 거주했는데, 1934년 초에는 약 6배에 이르는 5,813명까지 증가했다. 이후 스탈린 체제가 들어선 아래 시행되었던 이민족들의 강제이주 정책에 사할린 한인들도 자유롭지 못했다. 저자에 따르면, 1937년 이후로 ‘일본을 위한 간첩행위’란 누명을 쓰고 사할린 주의 1,155명의 한인들이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를 당했다.
 

 문제는 1920년 이후부터 1900년대 중반인 해방 정국시기까지의 일본 식민지 시기다.
 

 일제는 많은 이들을 일본과 조선에서 사할린으로 데려 오는 다양한 정책을 펼쳤다. 일제가 동원한 수단으로 크게 세 가지를 꼽고 있는데, 첫째는 모집(1939-42)이다. 그러나 이 모집 역시 거절시 불온자 명단에 등록한다는 겁박이 동시에 행해졌고, 계약서에는 온갖 거짓되고 허황된 정보를 늘어놓았다. 둘째 관 알선(1942-44)이다. 일제는 군대와 경찰력을 동원해 조선 남자들을 무턱대고 모아 일본의 섬이나 사할린 등지로 죄인 호송하듯 실어갔다. 이는 총독부 산하 조선노동협회(조선노무협회) 등의 담당했다. 셋째 국민징용(1944-45)이다. 일제는 ‘국민징용령’에 의해 어떤 조선인들도 임의적으로 동원할 수 있었고 거절 시 처벌할 수 있었다.​


<사할린 한인사> 자료를 참고하여 필자가 직접 작성한 표


 그렇게 남부지방에서 징용되어 사할린에 당도한 조선인들은 훗카이도 출신 이주민들과 달리 산림, 석탄, 수산 산업이나 교통 건설이라는 중노동에 동원되었다. 특히 산림과 광산의 노동환경은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유즈노-사할린스크 시 주민 엄판계에 따르면 나이부티 광산에선 아침 8시부터 밤10시까지 일을 해야했고 하루 걸러 야간 교대도 8시간씩 서야했다. 물론 이에 대한 대가도 없다시피했다.
 

 이에 얽힌 이야기는 이외에도 많다. 약 6천명 정도가 수용되어 노예와 같은 상태로 노동을 착취당한 ‘다코베야’에 관한 이야기, 1944년 연합군이 일본 해상을 봉쇄하면서 일본-사할린 간 석탄 운반길이 끊기자, 레소고르스키, 우글레고르스크 등 남사할린의 많은 광산들이 문을 닫으면서 그곳에서 일하던 조선인 남성 노동자 약 만 명 정도를 규슈 섬 등으로 옮긴 ‘이중 징용’ 등이 그것이다. 이렇게 또 한번의 생이별을 겪어야 했던 조선인들이 수도 없이 많았다. 또 하나, 일본 패망 직후 1945년 8월 20일부터 미주호촌이라 불렸던 홈스크 지역 파자르스키 마을에서 일어났던 일본군들의 조선인 학살 사건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패망으로 대단히 악의에 차오른 일본군들이 술에 취해 대나무 창, 군도를 포함한 온갖 무기로 조선인 27명을 잔혹하게 사살했다. 조선인들이 러시아 스파이짓을 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이는 당시 일본군들의 조선인에 대한 대우를 반증하고 있으며 씻을 수 없는 명백한 전쟁범위였다. 추후 1946년 12월 30일 소련최고소비에트 상임위원회의 결의에 의해 조선인 학살 주도자들에 대한 군법회의 선고에 따라 1947년 7명의 일본인은 처형되었고 나머지 사람들은 교화노동수용소 10년형이 처해졌다고 한다.
 


망향의 언덕과 현재

 

 그토록 기다리던 해방이 찾아오고, 사할린에 거주하던 조선인들은 코르사코프 항구 등지에 서서 조국에서 귀향선를 보내주기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그러나 배는 오지 않았다. 2007년 이 언덕 위에는 한강 포럼, 사할린 동포들, 대우건설, 재외동포재단, 사할린 우리말방송국 등 민간 모금 주도로 ‘망향의 언덕’이라는 이름의, 파이프 배 모양의 위령비가 세워졌다. 이 위령비에는 다음과 같은 금석문이 새겨져 있다. “배를 세우는 뜻은…짧은 여름이 지나 몰아치는 추위 속에서/ 이 분들은 굶주림을 견디며/ 고국으로 갈 배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습니다./ 이윽고/ 혹은 굶어 죽고,/ 혹은 얼어 죽고,/ 혹은 미쳐 죽는 이들이 언덕을 메우건만/ 배는 오지 않아/하릴없이 빈손 들고/ 민들레 꽃씨마냥 흩날려/ 그 후손들은 오늘까지 이 땅에서/ 삶을 가꾸고 있습니다./ 조국이 해방되었어도/ 돌아갈 길이 없어/ 아직도 서성이는 희생 동포들의 넋을/ 조국으로 세계로 자유롭게/ 모시려는 뜻을 모아/ 이 “망향의 언덕”에/ 단절을 끝낼 파이프 배를/ 하늘 높이 세웁니다.” 이는 세계한민족문화대전에서 발췌한 것이다.​




망향의 언덕 위령비 사진 출처: 세계한민족문화대전


 또 하나의 문제는 사할린에 남은 한인 이주민들의 법적 지위였다. 일본은 일방적으로 한인의 일본 국적을 박탈한 채 어떠한 국가로부터도 외교적 보호를 받을 수 없게 무국적자로 방치해두었다. 소비에트 정부 역시 한인을 포함한 외국인들에 대해 호의적이지 않았다. 일본도, 소비에트 정부도 사할린에 남겨진 한인들의 법적 지위 문제를 둘러싼 유엔 인권선언을 비롯한 국제법 규정을 지키지 않았다. 1954년 9월 무렵 무국적자 지위에 관한 국제협정이 선언된 뒤에야 한인에게 기본권 보장 등의 조치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이로써 한인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국적을 선택해갔다. 일부는 통일을 기대한 채 북한 국적을 취득했고, 다른 일부는 소련을 선택했다. 그 외 다른 이들은 남한의 고향을 그리며 무국적을 선택했다.
 

 현재 국내에 영주귀국한 사할린 동포들은 안산시 고향마을, 파주시 우정마을, 인천시 등지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영주귀국한 사할린동포 1세들이 이미 고령인 데다, 그들의 가족들은 귀국 및 입주 권한이 없어 빈집이 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지구촌동포연대는 아름다운 재단과 함께 카카오같이가치 사이트를 통해 올해 1월까지 '세상에 하나뿐인 달력2022'를 만들어 각지의 사할린 동포들에게 배포할 목적으로 모금활동을 벌였고 국내 영주귀국 사할린 교포들에게 달력을 배송했다. 이 사이트에서 관련된 정보와 소식들을 함께 볼 수 있다. 

사이트 주소: 카카오 같이가치 '세상에 하나뿐인 달력 2022 https://together.kakao.com/fundraisings/89765/news


 

참고 자료
 

사할린 한인사-19세기 후반기에서 21세기 초까지-, 아나톨리 쿠진, 2014

우리가 모르는 이별의 이야기-이산의 섬 러시아 사할린[YTN기획특집 다큐멘터리]https://www.youtube.com/watch?v=bsa_jOPsVik

사할린 한인 ‘저는 대한민국 사람입니다!’[KBS광복71주년 다큐멘터리]https://www.youtube.com/watch?v=tEjXAoOkwPw

한겨례, ‘평균 88살…사할린동포법 첫 대상 1세대 고국 품으로’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1021039.html

매일경제, ‘시행1년만에 ‘사할린동포법’ 개정 요구 목소리 높은 이유는’https://www.mk.co.kr/news/politics/view/2021/12/1137377/

국가법령정보센터 ‘사할린동포 지원에 관한 특별법’​



 


작성자 : khoco / 작성일 : 2022.05.31 / 수정일 : 2022.06.03 / 조회수 : 8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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