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권리 07. 영국, 호스피스로 '좋은 죽음'에 연착륙
현안과이슈 / by 우엉군 / 작성일 : 2022.08.09 / 수정일 : 2022.08.10

 “고통을 줄이는 방법은 안락사밖에 없는가?”

바다 저 편의 뉴스들이 죽음에 대한 상상력을 키우고 있습니다. 인간의 권리를 시간 순으로 나열한다면 가장 마지막에 '좋은 죽음을 맞이할 권리'가 위치하지 않을까요? 안락사, 존엄사, 호스피스에 대한 이야기와 정보들을 차곡차곡 쌓아갑니다.


영국의 ‘좋은 죽음’

호주, 캐나다, 네덜란드, 스위스 등에서는 안락사 제도가 빠르게 진화하고 있지만 여전히 꿈쩍도 하지 않는 국가들이 더 많습니다. 대표 국가는 영국입니다. 영국 정부는 2008년 생애말기돌봄전략을 발표하고, 보고서에서 ‘좋은 죽음(Good Death)’을 ‘익숙한 환경에서 존엄과 존경을 유지한 채, 가족 및 친구와 고통 및 기타 증상 없이 맞이하는 것’이라 정의했습니다.

호스피스 운동의 발원지인 영국은 좋은 죽음을 위해 ‘완화의료(Palliative Care)’를 오랫동안 정책적으로 채택하고 발전시켜 왔습니다. 완화의료는 말기 암, 신체기능저하, 만성질환 등 사실상 치료가 불가능한 질환을 겪고 있는 사람의 고통을 덜어주는 의료적 행위입니다. 완화의 핵심은 ‘고통 경감’입니다. 고통에는 신체적 고통 외에도 정신적, 심리적, 경제적 고통 등이 포함됩니다.

2015년에 발표된 ‘죽음의 질(Quality of Death)’ 지수에서 영국은 80개국 중 1위에 올랐습니다. 그 핵심에도 ‘완화의료’가 있습니다. 보고서는 영국의 국가보건의료정책(National Health Service; NHS)을 통한 완화의료 제도 강화와 민간 호스피스 운동의 확산에 주목했습니다. 지수를 처음 소개한 2010년 보고서에서도 영국은 40개국 중 1위를 했는데요, 그 때에도 좋은 죽음에 대한 공중 인식, 교육, 진통제 접근성, 의사와 환자의 커뮤니케이션 측면에서 이미 높은 점수를 얻었습니다.

영국에서 세계 최초의 호스피스 시설이 설립됐다 (출처: St. Christophers Hospice​ 웹사이트) 



호스피스 운동의 중심지

영국은 세계 최초로 현대적인 호스피스 운동이 시작된 곳입니다. 1967년에 시슬리 손더스(Dame Cicely Saunders)가 성 크리스토퍼 호스피스를 설립했고, 1980년대에 호스피스 설립 운동이 전국으로 번졌습니다. 이는 제도적인 측면에서 1991년 호스피스국가위원회 설립, 1995년 의사결정능력법 제정과 사전연명의료의향서 법적 기준 제시로 이어졌습니다.

한편, 2008년에는 세계호스피스완화의료연합(Worldwide Hospice and Palliative Care Alliance) 본부가 런던에 설립되면서 완화의료를 세계적으로 알리는 활동이 본격화됩니다. 그 중심에는 설립자인 스티븐 코너(Stephen Connor) 박사가 있습니다. 그는 1976년부터 1998년까지 미국호스피스 프로그램의 CEO를 맡았던 인물로, ‘고통 경감’이라는 완화의료의 핵심 철학을 국제사회 규범으로 한 단계 끌어올렸습니다.

코너 박사의 국제 애드보커시 노력은 2014년에 결실을 맺습니다. 그 해, 세계보건기구(WHO)와 함께 ‘생애말 완화의료 세계현황(Global Atlas of Palliative Care at the End of Life)’ 보고서를 발표하고, 세계인권선언 제25조에 기초해 세계가 ‘고통 경감의 국제적 위기’에 처해 있다고 규정하여 세계보건총회에서 완화의료를 그 해법으로 권고하는 결의안을 채택하는 실로 놀라운 전진을 이루어냅니다. 이는 완화의료가 고령화된 선진국만의 이슈가 아니라 아프리카 등 중저소득 국가와 아동에게도 절실하다는 인식의 대전환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매년 10월 8일은 '세계 호스피스 완화의료의 날'이다 (출처: WHPCA​ 웹사이트)



핵심 키워드는 ‘지역사회’

영국이 완화의료를 국제적 수준으로 성장시킬 수 있었던 배경에는 ‘지역사회’라는 키워드가 있습니다. 아무리 소득 수준이 높고 의학 기술이 발달하더라도, 완화의료 시스템이 대도시의 종합병원을 중심으로 설계되어 있다면 영국의 좋은 죽음은 작동하지 않습니다. 집과 같은 ‘익숙한 환경’에서 ‘고통과 증상이 없는’ 상태를 만들기 위해서는 동네병원이 참여하는 지역사회가 필수적입니다.

죽음의 질 지수의 평가 기준 역시 이를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아시아 1위인 대만(전체 6위)이 다른 아시아 국가들보다 좋은 평가를 받은 결정적 지점은 지역사회였습니다. 보고서는 대만 정부가 77개의 호스피스 프로그램과 69개의 호스피스 완화의료팀을 운영하고 있으며 국가의료보험으로 비용을 지원하고 있다고 분석했습니다. 이런 정책적 발전은 일본과 한국에서도 진행 중입니다. 이에 보고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종교 단체의 호스피스 운동 확산에 주목했습니다. 영국의 교회처럼 대만의 불교 단체들이 호스피스를 설립하며 지역사회에서 좋은 죽음을 준비할 수 있는 길을 열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영국의 완화의료는 계속 진화 중입니다. 그 방향은 지역사회와 환자 개인입니다. 영국의 기본적인 의료시스템은 동네병원 주치의(General Practitioner; GP)가 1차 진료를 담당하고, 종합병원 전문의가 2차 진료를 진행하는 단계로 설계되어 있습니다. 최근 정부는 임종의 장소로 대부분 집을 선호하고 있다는 점과 생애말기돌봄을 위해 환자 개인의 선호와 선택을 존중해야 한다는 점 등을 근거로 동네 주치의 지역사회 완화의료팀의 권한과 역할을 강화하고 전자완화의료조정시스템 등을 도입해 나가고 있습니다. 

최근 추진력을 얻고 있는 안락사 운동은 ​이미 30년을 앞서간 영국의 호스피스와 완화의료 시스템을 따라잡을 수 있을까요?

영국과 대만의 지역사회 영역에서 크게 격차를 벌렸다 (출처: The Quality of Death​ Index 2015 보고서)
 


참고 문헌







작성자 : 우엉군 / 작성일 : 2022.08.09 / 수정일 : 2022.08.10 / 조회수 : 77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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