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권리 02. 안락사 논쟁의 최전선, 캐나다 법원과 인권단체 BCCLA
현안과이슈 / by 우엉군 / 작성일 : 2022.05.03 / 수정일 : 2022.06.07

 
“죽음을 예견할 수 없는 병은 안락사 대상이 아니다?”

바다 저 편의 뉴스들이 한국에서 좋은 죽음에 대한 대화를 촉발시키고 있습니다. 한 사람의 권리를 시간 순으로 나열한다면 가장 마지막에 '좋은 죽음을 맞이할 권리'가 위치하지 않을까요? 안락사, 존엄사, 조력사에 대한 이야기와 정보들을 차곡차곡 정리하려고 합니다.

 



올해는 안락사 전진의 해가 될 것 같습니다. 역사적인 뉴스가 매달 연이어 발표되고 있습니다. 프랑스에서 들려온 알랭 들롱의 안락사 결단에 이어, 4월 첫 주에는 캐나다에서 신체적 질환이 아닌 정신 질환 환자에게도 안락사를 허용한다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이로서 캐나다는 2023년부터 세계 최초로 정신 질환 환자에게도 안락사를 허용하는 국가가 되었습니다.

캐나다 국회가 2016년에 제정한 안락사법(Medical Assistance in Dying, ‘Bill C-14’)은 의료적 조력자살을 허용하되 그 대상을 엄격하게 제한했습니다. 법조문은 자격 요건을 ‘견디기 어려운 고통과 치료 불가능한(grievous and irremediable)’ 질병으로 규정하며 사실상 말기암과 같은 신체적 질환으로 한정했습니다. 

당시에만 해도 정신적 질환은 안락사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분위기가 팽배했습니다. 2017년에 529명의 캐나다 정신과 의사를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도 응답자의 72%가 조력자살은 지지했지만, 정신 질환 환자의 안락사 허용에는 29.4% 만이 찬성할 뿐이었습니다. 불과 5년 사이에 캐나다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변화는 퀘벡 고등법원에서 벌어졌습니다. 2019년, 법원은 안락사법이 허용 대상으로 한정하고 있는 ‘상당히 예견 가능한 죽음(reasonably foreseeable)’이 위헌이라고 판결했습니다. 참고로 퀘백주는 2014년에 캐나다에서 가장 먼저 안락사를 합법화하는 법안을 통과시켰고, 2015년에 캐나다 최초로 안락사 사례가 나왔습니다. 





소송의 주체는 브리티시콜럼비아 시민자유협회(British Columbia Civil Liberties Association; 약칭 ‘BCCLA’)였습니다. BCCLA는 1962년에 설립된 캐나다 인권단체로 소송, 법개정, 입법 옹호 활동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모든 치료와 완화 시도가 실패한 환자는 존엄한 죽음을 선택할 자격이 있다는 입장에서 오랜 싸움을 전개해왔습니다. 안락사법이 제정된 이듬해인 2017년에 BCCLA는 안락사법이 만성적 장애나 의학적으로 치료가 어려운 질환 대상자들을 배제하고 있다고 소를 제기한 것입니다.

2017년, BCCLA는 그 동안 의료계에서 계속 진행되어온 논쟁을 법원으로 옮겨왔습니다. 캐나다 의료계에서 안락사를 둘러싼 논쟁은 두 갈래로 진행되어 왔습니다. 하나는 ‘정신 질환이 말기암처럼 남은 수명이 측정될 수 있느냐’ 입니다. 다른 하나는 ‘정신 질환은 과연 치료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입니다. 두 질문에 모두 그렇다라고 답할 수 없다면, 정신 질환을 겪으며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지만 의학적 치료가 효과가 없는 만성 질환자에게 안락사를 허용하지 않는 것은 기본권 침해라는 것이 BCCLA의 입장입니다.

2021년, 연방정부는 법원의 판결에 항소하지 않고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관련 법안(Bill C-7)을 통과시켜 2023년 3월부터는 정신 질환을 겪고 있는 환자도 안락사 대상자로 허용했습니다. 정신 질환에는 우울증, 조울증, 조현병, 심리적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그리고 거식증까지도 해당될 수 있다고 합니다. 4월에 이 뉴스를 처음 보도한 캐나다의 내셔널 포스트(National Post)는 우울증과 거식증으로 극심한 고통을 겪는 사람들의 사례를 소개하며 그 심각성을 균형 있게 보도했습니다.

안락사를 둘러싼 BCCLA의 치열한 소송 활동은 1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2010년, 척추협착증을 오래 앓아온 캐나다 여성 캐서린 카터(89)가 존엄한 죽음을 위해 스위스로 향했고, 디그니타스에서 안락사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 다음해에 카터의 딸과 근위축성 측색 경화증을 앓는 글로리아 테일러가 존엄한 죽음을 합법화를 요구했고, BCCLA는 이들을 대리해 자살과 자살 조력을 범죄로 규정한 형법(criminal code)이 캐나다 헌장에 위배된다는 소를 제기했습니다. 

4년간의 긴 법정 투쟁의 끝에 2015년, 연방대법원은 결국 조력자살 금지가 캐나다 권리와 자유헌장에 반한다는 위헌 판결을 내렸습니다. 같은 해에 쥐스탱 트뤼도 총리가 이끄는 자유당이 정권을 잡았고, 2016년에 캐나다에서 조력자살을 허용하는 첫 안락사법이 제정되었습니다. 

안락사법의 발전을 둘러싼 캐나다 법원과 BCCLA, 그리고 연방정부의 삼각 게임은 여러모로 흥미롭습니다. 하지만 승리와 패배를 떠나 첫 질문은 존엄한 죽음을 요구하는 한 시민의 외침에서 시작된다는 점이 중요하겠습니다.






참고 자료
캐나다, 불치병 환자 등 ‘조력자살’ 합법화 논란, 2016.05.19, 경향신문
퀘벡주, 캐나다 최초로 안락사 허용, 2014.06.12, 보건뉴스
Medical Assistance in Dying, British Columbia Civil Liberties Association 
This Ruling Changes Everything: The Story of Carter v. Canada, 2015.03.30, BC Civil Liberties Association


*사용된 이미지는 BCCLA 웹사이트와 유튜브 영상 스틸컷을 이용했습니다.






작성자 : 우엉군 / 작성일 : 2022.05.03 / 수정일 : 2022.06.07 / 조회수 : 10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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