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권리 04. 호주, 주 의회가 안락사의 틀을 잡다
현안과이슈 / by 우엉군 / 작성일 : 2022.06.06 / 수정일 : 2022.06.07

 
“국가가 안락사를 합법화해야만 할까?”

바다 저 편의 뉴스들이 죽음에 대한 상상력을 키우고 있습니다. 인간의 권리를 시간 순으로 나열한다면 가장 마지막에 '좋은 죽음을 맞이할 권리'가 위치하지 않을까요? 안락사, 존엄사, 조력사에 대한 이야기와 정보들을 차곡차곡 정리합니다.

 


5월 19일, 호주의 뉴사우스웨일즈(NSW) 주의회가 조건부로 안락사를 허용하는 법안을 통과시켰습니다. 뉴사우스웨일즈는 시드니가 위치한 호주의 가장 큰 주입니다. 언론은 이로써 호주 6개 주에서 모두 안락사가 허용되었다고 보도했지만, 국가 차원에서 호주는 아직 가장 큰 산을 남겨두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주는 멋지게 해내고 있습니다. 특히 의회제를 채택하고 있는 국가가 아래로부터 어떻게 안락사를 합법화시켜 가는지를 제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안락사 입법의 선봉장 ‘빅토리아주’

호주는 안락사를 ‘자발적 조력사(VAD; voluntary assisted dying)’로 지칭하며, 그에 대한 입법 권한을 각 주(state)에 부여하고 있습니다. 이를 가장 처음 입법한 주는 빅토리아주였습니다. 

2017년 9월, 빅토리아 주정부는 전문가 패널이 참여해 틀을 마련하고 법안을 발의했습니다. 브라이언 아울러(Brian Owler) 전 호주의학협회장이 패널 의장을 맡으며 의료계의 목소리를 반영했습니다. 빅토리아 자발적 조력사 법안(Victorian Voluntary Assisted Dying Bill 2017)은 아래 요건을 기본으로 하고 있습니다. 

첫째, 치료 불가능하고 경과가 상당히 진전된 질병이나 견디기 어려운 통증이 있어야 한다.
둘째, 2명의 의료진으로부터 남은 생명이 6개월 이내라고 진단을 받아야 한다. (단, 신경퇴행병은 12개월 이내로 함)
셋째, 18세 이상으로 의사결정 능력이 있어야 하며 최소 12개월 빅토리아주에 거주해야 한다. 
넷째, 정신적 질환이나 장애는 해당되지 않으나, 위 조건들을 충족한다면 조력사를 허용한다.


첫 질문에 대한 1946-2017 응답 변화 추이 (출처: Roy Morgan)

 
빅토리아주는 영리하게도 설문조사를 활용했습니다. 11월초, 호주 대표 시장조사기관인 로이 모건(Roy Morgan)은 18세 이상 1,386명을 대상으로 두 개의 질문을 던졌습니다. 첫 질문은 “치료 가망성이 없는 환자가 있다면, 의사는 그 환자를 가능한 살려야 할까요?”였고, 다음으로 “치료 가망성이 없는 환자가 극약을 요청하면 의사는 제공해야 할까요?” 질문이 뒤따랐습니다. 조사 결과는 1996년과 대비해 첫 질문에서 “환자가 죽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Let patient die)”는 답변이 69%에서 87%로, 두 번째 질문에서 “극약을 처방해야 한다(Give lethal dose)”는 답변이 74%에서 85%로 각각 증가하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설문조사가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지는 모르지만 같은 해 11월 29일에 빅토리아 주의회는 수정안을 통과시킵니다. 그리고 12월 5일에는 국왕의 재가(royal assent)를 받습니다. 형식적일지 몰라도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재가를 받은 것입니다. (참고로 영국에서는 현재까지 안락사가 불법입니다.) 빅토리아주를 시작으로 서호주, 태즈매니아, 남호주, 퀸즈랜드주가 차례로 의회의 문턱을 넘고, 올해 뉴사우스웨일즈주가 마지막 문턱을 넘게 된 것입니다.


주정부 안락사 합법 vs. 연방정부 안락사 금지

하지만 호주에는 6개 주만 있지 않습니다. 공식적으로 2개 준주(territory)가 더 존재합니다. 수도 캔버라가 위치한 ‘호주 수도 준주(ACT)’와 북부의 ‘노던 준주’가 이에 해당합니다. 준주도 의회에서 법률을 제정할 수 있습니다. 다만 연방 정부가 해당 법률을 수정하거나 폐지할 수가 있다는 한계가 따릅니다. 결국 2개 준주와 그 밖의 호주의 부속 섬들은 모두 연방 정부의 권한 아래에 있는 셈입니다.

흥미롭게도 2개 준주 중 하나인 노던 준주에서 세계 최초로 안락사 입법에 성공했었습니다. 무려 17년 전의 일입니다. 1995년, 노던 준주의회는 세계 최초로 ‘말기 환자의 권리에 관한 법률(Rights of the Terminally Ill Act 1995)’을 제정했습니다. 이는 주 단위에서는 미국 오리건 주보다 2년, 국가 단위에서는 네덜란드보다도 7년이 앞섰던 시기입니다. 1996년에 발효된 법을 통해 4명이 안락사를 받았습니다. 대부분은 필립 니치키(Philip Nitschke) 박사에 의해 진행되었습니다. 국가 안팎으로 논란이 컸던 만큼 안락사에 참여한 의사는 거의 없었던 것 같습니다. 


파랑색은 안락사 입법주, 빨강색은 아직 입법하지 않은 주 (출처: 위키피디아)


다음해인 1997년, 연방 의회가 개입해 준주의 안락사 입법 권한을 박탈하는 방법으로 안락사를 금지했습니다. 여기에서 두 개의 씨앗이 뿌리를 내립니다. 최초로 합법적인 안락사를 집행했던 필립 니치키 박사는 같은 해에 세계적인 안락사 단체인 ‘엑시트 인터내셔널(Exit International)’을 설립하고 안락사 옹호 운동에 뛰어들었습니다. 안락사에 반대했던 호주의사협회는 10년후 빅토리아주 자발적 조력사법의 기틀을 만드는데 참여하게 됩니다. (니치키 박사와 엑시트 인터내셔널 스토리는 다음에 따로!)

어쨌든 17년의 시간을 흘러 다시 공은 연방 정부에게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연방 정부와 의회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요? 관전 포인트는 연방법이 단지 주법을 따르는 수준에 머물지, 아니면 단점을 보완하며 한층 발전한 법안을 만들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안락사를 거부하는 사람들을 위한 피난처로 남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무엇이 되었건 호주의 사례는 연방제, 의회제, 지방자치제를 채택하고 있는 국가들이 뒤따를 수 있는 좋은 선례가 될 것입니다.



참고 자료

*사용된 이미지는 위키피디아, 차트는 Roy Morgan 자료를 사용했습니다.





작성자 : 우엉군 / 작성일 : 2022.06.06 / 수정일 : 2022.06.07 / 조회수 : 6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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